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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곽상훈
작성자 동래구육아종합지원센터 작성일 2021-07-15 조회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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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에서 1895년에 출생하였다. 보통학교 2학년을 마치고 동명학교에 들어가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교장 박규석(朴圭錫), 교감 김병규(金秉圭), 교사 이환(李煥)의 민족적 교육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곧이어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곧 인천으로 내려가 청년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는 창호지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동래로 왔다. 이때 동래에서는 독립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에 존경하던 이환 선생을 찾아 거사하자는 뜻을 전하고 선생의 골방에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하였다. 곽상훈은 선언문을 배부하며, 태극기를 작성하게 하여 3월 13일 동래읍 장날 오후 2시에 독립운동을 단행하기로 하였다. 동래고 학생과 주민들은 모여들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곽상훈은 많은 학생 주민과 함께 동래경찰서에 연행되었으나 주모자가 아니라고 항변하여 사흘만에 풀려나고 대구, 영등포 경찰서에서 각각 취조당하고, 서울지검 종로구치소에서 연루자로 추궁당하면서 온갖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아 8개월만에 예심에서 풀려났다.


그후 안동에 있는 오산학교 교사로서 재직하였다. 그때 애국지사 김영수를 만나,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서 활동할 계획을 세우려고 건너갔다. 그때 동경에서 그 유명한 대지진을 만나 동포들이 대대적으로 학살되는 참상을 목격하고 이곳의 참상자료를 수집하였다. 이를 국내에 가서 폭로할 것을 다짐하고 다시 안동 오산학교에 돌아왔다. 낮에는 학생에게 민족혼을 깨우치고 밤에는 자료를 정리하여 관청, 학교, 신문사, 일반유지 앞으로 보낼 호소문을 작성하였다.


대구도청에 출장을 빙자하여 여러번 출입했던 여관에 가서 우체국을 넣을 호소문 뭉치를 사환에 맡기고는 길을 가다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대구경찰서에서 의열단 관련여부 등을 추궁받고 유치장 생활 7개월만에 동래경찰서로 압송되었다. 4개월 후 중국행을 계획하고 좌천동에 있던 최천택의 도움으로 상해에 건너갔다. 국방부에 알고 있는 분은 고향선배의 애국지사 김갑 뿐이었다. 중국에서 청년동맹에 가입하기로 하였으나, 본래의 계획이 되지 않아 다시 인천에 상륙하였다. 여기서 다시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으나 이때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경찰에 요주의 인물로 감시의 대상이 되자 동래 기장에 은거하였다. 해방되는 전야 일본은 국내의 지사들 움직임을 경계하는 방책으로 여러 인사를 구속하게 되었는데 곽상훈도 역시 예비 구속되었다. 해방후 한민당의 창립에 힘쓰고 당원으로서 활동하며 1948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4.19의거 후 민주당 집권과 함께 국회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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